기업 탐방
[아티(ATI) 기업탐방] 라인문화재단 (아트모아 기자단 5기 최영현 기자)
[아티(ATI) 기업탐방] 라인문화재단
“장소의 서사를 통해 시대를 읽어내다.”
라인문화재단 고원석 디렉터
대안공간부터 공공미술관, 그리고 사립재단까지
한국 미술계의 다양한 지형을 경험해온 고원석 디렉터.
장소와 시간의 맥락을 읽어내고,
관람객이 예술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온
그의 기획 철학은 라인문화재단에서 새롭게 펼쳐지고 있다.
이번 인터뷰에서는 프로젝트스페이스라인 개관으로 본격화된 재단의 전시 사업과
2027년 문을 여는 성북동 미술관의 지향점,
그리고 20여 년간 전시기획자로서 축적해온 그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라인문화재단 고원석 디렉터
간단한 자기소개와 함께 현재 담당하고 계신 라인문화재단 디렉터로서의 주요 업무에 대해 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대학원에서 예술 경영을 전공하고 지금까지 전시 기획자의 길을 걸어온 고원석입니다. 대안공간과 미술관을 비롯해 여러 기관에서 다양한 전시를 기획해 왔습니다. 최근에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전시교육과장으로 여러 큐레이터들과 함께 전시를 만드는 일을 하다가, 임기를 마친 후 2024년부터 라인문화재단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라인 문화재단에서는 전시 프로그램 기획을 포함하여 재단이 수행하는 학예적인 업무 전반을 총괄하고 있습니다. 현재 2027년 4월 개관 예정인 성북동 미술관 건립 준비에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라인문화재단은 2008년 설립 이래 예술인 지원과 문화 활동 후원을 통해 한국 미술문화 발전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재단에 대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라인문화재단은 말씀해주신 것처럼 2008년에 설립되었으며, 모기업인 라인그룹의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라인그룹은 재단 설립 이전부터 꾸준히 문화예술 후원 활동을 해왔고, 2008년 공식적인 재단 설립 이후에도 예술인들을 후원하는 활동을 이어왔습니다. 10여 년 전부터는 미술관 건립을 계획하고 부지 매입부터 건립까지 본격적인 준비에 착수했습니다. 작년부터는 이러한 사업들을 체계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학예실 조직을 구성했으며, 이제는 단순 후원을 넘어 미술관 운영을 위한 기획과 실행 역량을 갖춘 조직 체계로 전문성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간접적인 지원에 주력해오던 라인문화재단이 '프로젝트스페이스라인' 개관을 통해 직접적인 미술 사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프로젝트스페이스라인은 말 그대로 ‘프로젝트 스페이스’로 시작한 공간입니다. 당시 저희 재단에서는 성북동에 미술관 건립을 본격 추진하기 전, 내부적으로 여러 프로그램을 시도하고 준비하는 과정으로서 작은 규모의 전시 공간을 운영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작년 11월에 공간을 개관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실험하며 운영 경험을 쌓았죠. 이 전시 공간은 성북동 미술관 개관 준비의 시뮬레이션 성격을 띠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프로젝트스페이스라인을 계속 운영할지, 일정 기간 후에 문을 닫을지 등 모든 계획이 불확실한 상태로 시작했었습니다. 작년 11월부터 올해 1월까지 첫 번째 개관 시즌을 운영했고, 이후 내부 논의를 거쳐 성북동 미술관 건립에 본격 집중하기 위해 잠정적으로 전시장 운영을 중단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을 통해 재단 내부의 미술관 운영에 대한 이해도가 크게 높아졌습니다. 실제 미술관 업무에 오랫동안 종사한 경험이 있는 분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도 계셨거든요. 다양한 배경을 가진 분들이 함께 일하다 보니 프로젝트 스페이스 운영은 성북동 미술관을 위한 중요한 경험치를 쌓는 기회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프로젝트스페이스라인 전경(라인문화재단 제공)
개관전 《모든 조건이 조화로울 때》는 '무장소성'이라는 도시의 특수성을 주제로 삼았습니다. 획일화되고 표준화된 도심 공간에서 장소와의 관계성, 공간적 의미를 새롭게 정의하고자 하는 기획 의도가 궁금합니다.
네, 맞습니다. ‘무장소성’은 도시와 문명이 발전하면서 각 지역이 가진 특성이나 역사적 배경들이 제거되고, 획일적이고 표준화된 도심의 풍경들이 펼쳐지고 있는 현상을 말합니다. 사람마다 도시나 공간에 대한 인식이 개인의 성장 환경이나 경험에 따라 다를 것 같은데요. 저 같은 경우는 주로 강북에서 살아오고, 미술관이나 기관 등 미술계 인프라도 대부분 그쪽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재단에 들어오면서 삼성동에서 근무하게 됐는데, 이곳은 저에게 다소 낯설고 획일화된 공간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면서 예전에 관심 있던 도시 심리학이나 도시 이론이 떠오르게 되었죠. 이러한 이론을 바탕으로 읽었던 책들을 찾아보고 리서치하는 과정에서 에드워드 렐프(Edward Relph)라는 학자가 말한 ‘무장소성(placelessness)’ 개념이 생각났습니다. 세계 주요 도시들을 가보면 원래의 모습은 알 수 없고, 다 비슷한 건물과 도로만 남아 있잖아요. 특히 똑같은 건물들 똑같은 도로들 이런 무색 무취한 공간이 된 한국의 도시들이 더 그렇고요.
저는 강남이 전형적인 무장소적인 공간처럼 보였습니다. 삼성동 일대 전시장 주변도 마찬가지였어요. 도로가 직각으로 반듯하게 뻗어 있는데, 이건 1970년대 강남 개발 당시 벌판을 밀어 도로부터 깔고 시작했기 때문이죠. 이런 과정에서 도시의 역사성은 거의 찾기 힘들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무장소성 개념을 전시에 하나의 레퍼런스로 가져왔고, 전시의 시간과 공간 자체를 중요한 맥락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전시장에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을 도외시하지 않고 전시의 정체성으로 끌어들이려는 기획 의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도는 앞으로 조성될 성북동 미술관에서도 이어질 겁니다. 강남과는 또 다른, 고유한 로컬리티와 뚜렷한 역사성을 가진 곳이기에 성북동이라는 지역성을 중요한 정체성으로 나아갈 예정입니다. 결국 ‘개관 전 모든 조건이 조화로울 때’라는 주제 역시 장소성, 그리고 시공간적 맥락과의 관계에 대한 의지 표명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개관전《모든 조건이 조화로울 때》는 신설된 전시장의 장소성과 건축적 배경을 신작으로 해석하는 특별한 기획이었습니다. (커미션: 우아하면서도 복잡한 예술실천, 고원석에서 발췌) 새로운 작품을 위한 박기원 작가님, 박소희 작가님과의 커미션 과정에서 인상 깊었던 에피소드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전시 기획을 시작한 시점이 2024년 7월이었고, 전시는 11월에 개최될 예정이었습니다. 보통 전시는 최소 1년 정도 준비하는데, 불과 4개월 만에 전시를 해야 했기 때문에 좀 특수한 환경이었습니다. 많은 수의 작가님들과 함께할 시간적 여력이 안 된다고 판단했고, 제가 밀접하게 소통할 수 있는 단 두 분의 작가님과 전시를 하기로 생각했었습니다.
박기원 작가님은 예전부터 잘 알고, 함께 기획한 경험도 있었기 때문에 어떠한 작품을 하실지, 어떤 과정이 펼쳐질지에 대해 미리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전시 기획을 하다 보면 작가에 대한 확신이 중요할 때가 많거든요. 박 작가님은 제가 상황을 말씀드리면 바로 이해하고 작품으로 풀어내 주셨습니다. 저는 그 작품이 제작되고 놓일 수 있도록 예산, 운송, 제작 및 설치 지원 등 행정적인 부분들 또한 진행했습니다.
반면, 박소희 작가님과는 처음 일하게 되었습니다. 다루는 재료가 식물인데, 미술 작품 치고는 생소한 재료여서 어떻게 될지 조금 염려가 되기도 했죠. 하지만 작가님의 기존 설치 작품들을 보고 이 공간도 충분히 풀어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판단해서 함께했는데, 제 예상에 다 맞아떨어졌습니다. 아주 쉽고 즐겁게 전시를 진행할 수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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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희, COMPLEX_root (라인문화재단 제공)
두 분 작가님의 작품은 1층부터 3층까지 유기적으로 이어지도록 설치했습니다. 1층은 박소희 작가님의 작품, 3층은 박기원 작가님의 작품, 그리고 2층은 두 분의 세계가 만나는 공간이었죠. 공간을 층별로 분할된 것이 아니라 층과 층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설치를 진행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두 분의 조화가 굉장히 중요했는데, 작품들이 너무나 조화롭게 잘 어우러져 제 기획 의도가 잘 구현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좌)박기원, 중정 (우)박기원, 허공속으로 (라인문화재단 제공)
성북동 현대미술관 개관을 앞두고 계십니다. 프로젝트 스페이스 라인은 성북동 미술관 건립 이전 사전 프로젝트의 역할을 한다고 알고 있는데요. 성북동 현대미술관의 역할과 앞으로의 방향성이 궁금합니다.
네. 성북동 미술관은 약 8천 제곱미터 규모의 건축물과, 그 뒤에 약 1만 제곱미터의 정원을 갖추고 있습니다. 서울 시내에서 이렇게 큰 정원을 가진 미술관은 많지 않기 때문에, 이 점이 미술관의 중요한 정체성이 될 겁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프로젝트 스페이스 라인에서 실험했던 ‘미술관이 존재하는 위치와 시간에 대한 해석’이 성북동 미술관에도 DNA처럼 이어질 거라 생각합니다. 사전 프로젝트 과정에서 축적된 경험과 시도가 성북동 미술관 운영에 잘 전달되고 반영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경희대 경영대학원 문화예술경영학과 석사를 전공하셨습니다. 문화예술 직종에 종사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저는 학부에서 무역학을 전공했습니다. 무역학이 학문적으로는 경영학에 속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경영학을 공부하게 되었죠. 졸업 후에는 다른 사람들처럼 취직을 해서 직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전형적인 경영 전공자인 비즈니스맨으로 2년 정도 살았는데, 그 과정에서 제 삶에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점점 커져갔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직접 예술을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삶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다 보니 ‘예술을 공부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예술 중에서도 미술사나 미학 같은 여러 분야를 고민하던 중, 마침 국내에 문화예술경영 전공이 막 신설된 시기였고, 저는 ‘이 전공이라면 예술을 배우면서 동시에 학부에서 공부했던 경영학과 접목해 새로운 역할을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2001년 경희대학교 대학원 문화예술경영학과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문화예술 직종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대안공간, 공공미술관, 사립재단등의 기관들을 포함해 국내외 대형 프로젝트 기획, 미술 평론 등 다양한 경력을 쌓아 오셨습니다. 이러한 과정들이 현재의 기획 방식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기관별 차이는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본격적인 기획은 대안공간 풀에서 처음 시작했습니다. 이후 기획사, 공공미술관,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또 해외, 중국에서도 1년 반 정도 전시를 했고요. 아르코미술관을 거쳐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서울시립미술관 전시교육과장까지 담당했습니다. 기관마다 전시 기획 방식이 확실히 달랐습니다. 먼저 대안공간에서는 날카로운 주제와 젊고 참신한 작가들의 실험적인 작품을 보여줘야 했죠. 제가 활동하던 시기는 특히 한국 미술에 젊은 작가들이 활발히 등장하던 때라, 그 에너지가 굉장히 강렬했습니다. 그런 흐름 속에서 작가들과 함께 호흡하고 연대감을 가지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어요.
다음으로 공공미술관은 말 그대로 ‘공공성’이 핵심이었습니다. 제가 기획한 전시가 단순히 작품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공공의 이해와 삶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늘 의식했죠. 반대로 사립재단의 경우에는 기본적인 공공성은 유지하되, 기관의 특수성과 색깔을 살린 기획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일했던 공간사(현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는 김수근 건축가의 사옥이었던 공간사옥에 있었는데, 그런 장소적 특성이 기획에 큰 영향을 주기도 했습니다. 제가 속한 기관, 혹은 장소와 시간에 따라 기획 방식이 굉장히 유연하게 바뀌어 왔고, 저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자신이 생각한 기획 개념을 언제 어디에 가든 정확하게 구현해야 한다고 생각하시지만, 저는 조금 더 플렉서블하게 시간과 장소에 잘 맞게 변화해야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며 기획을 해왔습니다.
이러한 여러 종류의 기관들을 경험하다 보니, 큐레이터의 역할이 단순히 전시 기획만을 넘어 미술 평론, 작품 커미션 등 다양한 일을 아우르는 직업이 된 현재에 제가 잘 적응할 수 있는 장점이 생긴 것 같습니다. 이처럼 유연하고 넓어진 큐레이터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다양한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작품 선정부터 공간 설계, 관객과의 네트워크까지 기획 과정에서 디렉터님만의 기준이나 중요시 여기는 부분이 있으신가요?
먼저 작품을 선정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작가와의 소통입니다. 작가와 소통하는 과정에 있어 작가 세계의 큰 틀을 제가 기획하는 전시의 주제로 억지로 재단하거나 절개해 들어가려 하지 않아야 하죠. 가급적이면 작가가 가진 작품 세계의 범위와 유연성을 그대로 가져와 수용할 수 있는 기획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작가에게 작품은 하나의 우주이자 세계와 같기 때문에 그 안에 작가의 인생은 물론, 그와 관계했던 모든 시공간이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의 한 측면만을 너무 강조하는 것은 사실 큐레이터에게는 유리하고 편리한 일이지만, 저는 제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는 영역까지도 존중하고 끌어오고 싶습니다. 서로가 명확하게 인식되거나 이해되지 않아도, 작가의 본질적인 이야기를 담아내는 것을 중요시 여깁니다.
다음으로 공간 설계를 할 때는 관람객의 동선을 최우선으로 생각합니다. 전시가 아무리 스펙터클하더라도 관람객의 동선에 혼란을 주거나, 위계를 느끼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원래 그 자리에 놓여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작품을 배치하여 관람객이 거부감 없이 들어와 보고 나갈 수 있는, 나중에 그 작품을 떠올리도록 만드는 공간디자인을 추구합니다.
마지막으로 관객과의 네트워크는 최대한 많이 하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관람객을 직접 만나보고, 어떻게든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들려고 합니다. 전시 기간 중에 프로그램을 최대한 많이 만들어 다양한 관람객을 초청하고 대화를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 욕심만큼 많이 만들지는 못하고 있지만, 관객과의 접촉면이 많아질수록 전시는 더 잘 이해받고 애정을 받을 수 있죠.

《모든 조건이 조화로울 때》기자간담회에서 고원석 디렉터가 전시 소개를 하고 있다. (라인문화재단 제공)
전시 기획의 영감은 주로 어디서 얻으시며, 어떤 방식으로 아이디어를 수집하고 발전시키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기획하고 싶고 관심있는 몇 가지 큰 맥락이 있습니다. 바로 에드워드 렐프, 이 푸 투안, 앙리 르페브르 같은 심리적 혹은 현상학적 철학에 기반을 둔 학자들의 지리학인데요. 이러한 관점은 제가 예전부터 자주 다뤄왔던 기획 주제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무장소성' 그리고 공간사옥과 같은 건축물에서 전시를 기획할 때도 깊이 있게 연구해온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경험은 기획 아이디어로 꾸준히 가져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들이 동어반복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동시대성이 매우 중요합니다. 지금, 여기를 계속해서 읽어내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전시 기획 영감을 많이 얻고 있습니다.
주로 요즘 어떤 일들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활용합니다. 기사를 계속 살펴본다든가, 특히 해외 언론인 뉴욕타임스 같은 매체를 꾸준히 매일 조금씩 읽는 것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운전하고 출퇴근할 때 팟캐스트 같은 것을 많이 듣는 편인데, 제가 좋아하는 분야에서 대화를 나누는 이야기들을 많이 귀담아듣습니다.
디렉터님의 기획하신 전시들의 전시명도 매우 인상적이었는데요. 전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도 한 전시명은 어떻게 정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전시의 성격이나 지향점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언어를 선호합니다. 너무 특이하거나 화제만을 불러일으키는 제목보다는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제목을 더 좋아하는 편이고, 가급적 길지 않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예를 들어, 프로젝트 스페이스 라인의 전시였던 모든 조건이 조화로울 때는 제가 기획 텍스트에도 썼듯이, 박기원 작가님의 작가 노트를 읽다가 발견한 문구였습니다. 작가님께서 구상한 작품을 설명하면서 "모든 조건이 조화로울 때 이 작품은 이렇게 존재하게 될 것이다"라고 물리적인 배경으로 쓰셨는데, 그 말이 너무 좋았습니다. 이 복잡하고 어수선한 시내 한가운데서도 사실 그 안에 질서와 조건들이 존재하는데, 그 조건들이 잘 조화롭게 되면 굉장히 잘 짜인 질서가 될 수도 있겠다는 점이 흥미로웠죠. 그래서 그 문구를 제목으로 채택하기도 했습니다. 보통은 핵심이 되는 단어를 시적인 단어로 쓰는 편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너와 나의 이야기' 같은 제목을 쓴 적도 있고, 그 이전 전시들은 '마찰', '흔적'처럼 짧은 단어들을 선호했지만 때마다 다릅니다. 제목은 전시를 잘 대변하면서도 결국 전시를 보러 올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언어를 듣고 전시를 보러 가고 싶게 만드는 그런 언어적 매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조건이 조화로울 때》전시 현장에서 고원석 디렉터가 전시 소개를 하고 있다(라인문화재단 제공)
큐레이터가 갖춰야 할 핵심 역량은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큐레이터에게 가장 중요한 역량은 소통 능력입니다. 아티스트는 자기만의 세계를 세상과 소통하며 그 세계를 잘 만들어 보여주는, 개인화된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인 반면, 큐레이터는 다양한 사람들과 원활하게 소통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소통을 잘하려면 경청하는 태도가 필요하고, 언어를 잘 다루는 것도 중요합니다. 외국어 같은 기술적인 부분도 어느 정도 갖춰야 하고, 글쓰기나 말하기 같은 언어 감각도 필요하죠. 무엇보다 상대방의 입장과 시각을 이해할 수 있는 공감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 공감 능력이 있어야 소통이 원활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는 멀티태스킹 능력이 정말 필요합니다. 일을 하다 보면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처리해야 할 때가 많거든요. 예산을 철저하게 계산해서 절약할 줄 아는 실무 능력도 필요하고, 쉽게 만나기 힘든 작가들과 특별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언어 능력, 시적인 언어까지 구사할 수 있는 능력까지 다양한 자질을 갖춰야 합니다.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재직 당시 인터뷰 기사에서 '미술관은 관객이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답변해주신 것을 읽었습니다. 그러한 생각은 현재도 유효하신가요?《모든 조건이 조화로울 때》전시 개요문에서도 관객의 입장에서 체험을 유도하는 설명 또한 인상적이었습니다.
네, 물론입니다. 제 개인의 생각이라기보다는 동시대 큐레이팅이 진화하고 있는 방향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큐레이팅에서 큐레이토리얼(Curatorial)로 개념이 확장된 것은, 단순히 눈으로만 보는 전시가 아니라 경험하고 체험하며 서로 배우는 일종의 체험형, 학습형 전시들이 중요하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전시뿐만 아니라 전시에 동반된 여러 장치들, 프로그램들, 또는 활동들이 함께 시도되고 공유되는 것이 오늘날 전시의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지금은 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부산시립미술관에 있을 때인 2017년도에 한창 그런 이야기들이 나올 때이기도 했습니다. 저도 그런 흐름을 구현하고 싶기도 했고, 그 이전부터 미술이 사람들에게 어떤 지적인 결과로 위계감을 주는 것에 약간 거부감이 있었습니다. 꼭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거든요. 천천히 알아가면서 봐도 됩니다. 진입 장벽이 높을 필요는 없고, 그러다가 알게 되면서 취향도 바뀌고, 좋아하는 작품들도 바뀌고, 예전에 봤던 작품들을 다시 재평가하기도 하는 생태가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진입 장벽은 낮고, 좀 더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끌어올 수 있는 미술관이 좋겠다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이러한 철학은《모든 조건이 조화로울 때》전시에도 이어졌습니다. 저는 새로 생기는 그 공간, 저도 다 지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기획을 시작했던 그 공간이 공간 자체로 체험되기를 바랐습니다. 미술은 사실 어렵잖아요. 머리가 아프기도 하고, 굉장히 복잡한 개념이나 어떤 팩트를 알아야 이해가 되는 작품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번 전시에서 관람객들이 시각적으로 뭔가를 이해하고 독해해서 읽어내야 하는 작품이기보다는, 그 공간에서 시선, 촉각 등 여러 공감각을 동원해 한 번 체험하기를 바랐습니다.

《모든 조건이 조화로울 때》전시 개요문(라인문화재단 제공)
디렉터님께서 앞으로 이루고자 하는 목표 또는 라인문화재단에서 만들어가고 싶은 계획이 있으시다면 공유 부탁드립니다.
라인문화재단에서 가장 중요한 계획은 새로운 미술관을 짓는 일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즐겁게 와서 한참 놀다 가는 미술관을 만들고 싶습니다. 쉬워 보이지만 참 어려운 일인데요. 단순히 전시만 보고 빨리 나가는 것이 아니라, 즐겁게 머무르는 공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런던의 테이트 브리튼 같은 곳에 가보면, 거의 평생을 그 미술관을 다녔던 나이 지긋한 노인분들이 계십니다. 그런 분들이 아침부터 잘 차려입고 오셔서 미술관에 들어와 일단 차를 한 잔 마시죠. 그리고 친구들과 대화를 한참 나누다가 천천히 올라가서 전시를 관람하고, 다시 내려와 점심을 먹거나 차를 마시며 또 대화를 나누다가 돌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여러 전시를 천천히 즐기면서 시간을 보내는 삶이 이루어진다면, 삶이 덜 삭막하고 덜 외롭잖아요. 한국 사람들이 너무 바쁘게 기능 중심적으로 살다 보니, 미술관 관람도 도장 깨기처럼 될 때가 있는데, 미술관은 그런 곳이 아닙니다. 작품 하나를 놓고도 천천히 한 시간을 볼 수도 있고, 꼭 작품을 보지 않아도 커피를 마시면서 노트북으로 일을 하거나 생각을 정리할 수도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북동 미술관이 가진 '정원'이라는 배경을 놓고 이러한 목표를 어떻게 연결해서 실현할 수 있을지 많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관람객들이 여유롭게 예술을 즐길 수 있는 공간, 그런 미술관을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다.

성북동 미술관 조감도 (라인문화재단 공식 홈페이지)
